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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큰증권 제도화’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 [김기동의 이슈&로(LAW)]

가상화폐

디지털자산(가상자산)이 금융 제도로서 빠르게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 중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이야말로 디지털자산 시대의 시작을 알리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은 미국 달러와 1대 1로 가치가 고정돼 있는 코인을 말한다. 가상자산 시장의 변동성을 보완하고, 디지털 금융 생태계의 결제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개발됐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는 근거 법률인 지니어스 액트(GENIUS Act)가 올해 7월 트럼프 대통령의 서명을 거쳐 입법이 완료됐다. 하위법규가 마련되는 내년 이후 시행될 것이다. 1971년 닉슨의 금태환 포기 선언에 버금가는 ‘달러 체제의 변화’로 평가되고 있다.여전히 토큰증권 ‘출발 신호’ 기다리는 韓스테이블코인은 블록체인 네트워크 상에서 중개기관 없이 개인 간(P2P) 직접 거래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기존 은행 중심 금융 체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또 24시간·저비용·즉시 결제가 가능하다. 모든 거래는 기록되고 영구히 남는다. 손쉽게 국경을 넘어 가치를 전송할 수 있다. 기술적으로는 달러를 소수점 이하로 쪼개 사용할 수 있다. 달러 스테이블코인의 도입을 가능하게 한 이러한 블록체인 기술의 유용성은 필연적으로 ‘자산의 토큰화’를 초래한다. 자산을 토큰화하면 실물자산의 소유권·수익권·지분 등을 디지털 토큰으로 전환하여, 블록체인 상에서 거래·이전·분할·증명할 수 있게 된다. 이미 해외에서는 ‘자산의 토큰화’가 기존 금융시스템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금융화할 수 있는 자산의 경계가 사라지고, 시장의 시간은 24시간으로 확장됐다. 국채·머니마켓펀드부터 부동산 조각투자에 이르기까지, 자산의 토큰화라는 거대한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약 330억달러(약 47조원) 규모의 실물자산이 토큰화됐다. 세계 최대 자산 운용사인 미국의 블랙록은 ‘모든 자산의 토큰화’ 계획을 밝히고, 블록체인 머니마켓펀드로 유동성 시장을 만들고 있다. 이러한 혁신은 거래소와 플랫폼으로 확산되고 있다. 코인베이스와 나스닥은 상장주식과 상장지수펀드(ETF)의 토큰화를 위해 SEC(미국 증권거래위원회)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미국의 부동산 플랫폼 리얼티는 주택을 토큰화해 투자자에게 임대수익을 분배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뿐만 아니라 다른 금융 선진국도 토큰증권을 금융시스템으로 수용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 중이다. 영국 금융감독청(FCA)은 자산운용사들에 대해 자사 펀드를 토큰 형태로 발행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규제안을 내놨다. 프랑스 금융당국청(AMF)도 유럽 최초의 블록체인 기반 증권거래소 ‘LISE’ 운영 규칙을 공식 승인했다. LISE는 시가총액 5억 유로 이하 프랑스 중소기업(SME)의 주식을 토큰화해 개인 투자자가 디지털 지갑을 통해 직접 거래할 수 있도록 설계된 플랫폼이다. 이와 같이 세계는 이미 ‘토큰화된 경제권’으로 이행 중지만, 우리나라는 아직도 제도의 출발선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형국이다. 2023년 2월 금융위원회가 ‘토큰증권 발행·유통 규율체계 정비방안’(토큰증권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새로운 증권 유형인 ‘토큰증권’의 발행을 전면 허용한다고 밝혔다. 토큰증권은 ‘자산의 토큰화’의 하위 개념으로서, 특정 자산을 증권 형태로 토큰화하는 것을 말한다.토큰증권은 분산원장(블록체인)에서 발행한다는 점에서 전자증권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관련 법률의 제·개정이 이뤄지면 분산원장도 법이 인정하는 공적 장부가 된다. 올해 9월, 자본시장법 시행령 개정을 통해 토큰증권 도입의 선제 조건이라 할 수 있는 비상장주식과 조각투자 장외거래 플랫폼이 허용됐다. 그러나 정작 분산원장 관련 법안은 우선순위에 밀려 입법에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글로벌 흐름 따라잡아야 할 이유토큰증권은 유동성이 닿지 않던 곳에 새로운 시장을 만든다. 또한 자산가가 아닌 일반인도 고액 자산에 투자할 수 있도록 하여 ‘투자의 민주화’를 촉진한다. 소상공인·스타트업의 자금조달에 활용될 수 있는 ‘공동수익권’이나 ‘비상장주식’과 같은 비정형적이고 유동성이 낮은 자산을 자본시장으로 편입시키는 금융 인프라로서의 잠재력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정부 당국과 기존 국내 자본시장은 토큰증권의 활용범위에 대해서도 매우 보수적이다. 결국, 문제의 핵심은 기술이 아니라 제도의 상상력이다. 기술이 만든 신뢰를 제도가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시대의 질문이다. 다행히 새 정부는 ‘토큰증권의 제도화’를 국정과제에 포함시키며, 법안 통과를 향한 추진력을 다시 끌어올리고 있다. 세계 금융 인프라가 블록체인 위에서 재구성되는 지금, 한국 자본시장이 이 흐름을 따라잡지 못한다면 자칫 세계적 금융 혁신의 흐름에서 낙오하게 될지도 모른다. 입법 및 정책 당국의 열린 시각이 필요한 시점이다. 아울러 기업에서도 ‘자산의 토큰화’에 대한 대비를 갖추어야 한다. 기존에 접하지 못했던 새로운 법무 및 회계·세무 리스크가 등장할 것이다. 변화를 읽고 준비하는 조직과 국가만이 미래를 주도할 수 있다.김기동 법무법인 로백스 대표변호사

2025.10.31 07:00

4분 소요
네덜란드 정부가 민간 기업 CEO를 갈아치운 이유는?[한세희 테크&라이프]

전문가 칼럼

네덜란드에는 ‘비상 물자 공급법’(Goods Availability Act)이란 법이 있다. 국가 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될 경우, 정부가 기업 이사회 결정을 무효로 만드는 등 강력하게 개입할 수 있게 하는 법이다. 네덜란드 같은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이런 법을 실행할 일이 있으리라 생각하긴 어렵다. 그런데 냉전 시대 1952년 제정된 이 법이 70년만에 처음 실제 발동되는 일이 벌어졌다. 9월 말, 네덜란드 정부가 반도체 기업 넥스페리아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간 것이다. 중국인인 장쉐정 CEO도 해임하고 임시 CEO를 지명했다. 정부는 “넥스페리아 지배 구조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며 위급 상황에서 반도체 수급이 제대로 안 되는 상황을 막기 위해 이 같은 조치를 취한다고 밝혔다. 이번 조치가 “매우 이례적”이라는 점은 인정했다. 70년만에 처음 발동된 비상 조치 넥스페리아는 네덜란드 네이메헌에 본사를 둔 토종 기업이지만, 주인은 중국이다. 2019년 중국 휴대폰 위탁 제조사 윙텍이 인수했다. 자동차와 가전 제품에 들어가는 범용 반도체를 주로 생산한다. 네덜란드 본사와 유럽 공장에선 설계와 전공정 제조를 담당하고, 중국 법인에서 패키징해 최종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식으로 역할을 분담했다. 전체 생산량의 80%가 중국에서 완성돼 출하된다. 넥스페리아는 중국 소유 기업이라는 점 때문에 최근 미국 정부의 제재 리스트에 올랐다. 미국 기업이 제재 리스트에 오른 기업과 거래하려면 미국 정부의 사전 허가를 얻어야 하는 등 까다로운 조건이 필요하다. 사실상 국제 시장 퇴출이다. 미국은 제재를 벗으려면 장쉐정 CEO를 해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장 CEO는 유럽 본사와 중국 법인을 분리해 유럽측 독립성을 유지하기 원하는 정부 방침을 거부하고 화사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는 시도를 해 왔다. 본사에선 넥스페리아 반도체 핵심 지적재산권(IP)이 유출되고, 생산 시설 역시 대거 중국으로 이전될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이러한 갈등이 결국 비상 물자 공급법 실행이라는 결말로 이어졌다. 당연히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중국 정부는 이 조치를 규탄하며 중국에서 생산되는 넥스페리아 최종 제품의 수출을 봉쇄했다. 넥스페리아 중국 법인은 “중국 자산의 안보에 대해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며, 중국 현지 직원에게 네덜란드 본사 지시를 따르지 말라는 지침을 내렸다. 중국 법인은 중국 기업으로서 독립적으로 운영될 것이란 선언이다. 넥스페리아 본사는 장 CEO가 “중국 법인이 이제 독립적으로 운영된다”거나 “넥스페리아가 월급을 제대로 지불하지 않았다”와 같은 거짓을 퍼뜨리고 있다고 맞서고 있다. 넥스페리아를 둘러싼 혼란에 세계 주요 자동차 기업들은 부품 수급난을 우려하고 있다. 넥스페리아는 일부 자동차용 범용 반도체 제품 시장에서 1~2위를 유지하고 있다.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한 제품은 아니지만, 수급이 안 된다면 자동차 제조 라인을 멈춰 세울 수 있다. 범용 부품 제조와 유통이 막혀 전체 자동차 생산에 차질을 빚었던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 넥스페리아 사태는 미국과 중국의 기술 패권 전쟁에 유럽이 동참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자유 무역에서 경제 안보로 유럽의 초점이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네덜란드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의 요충지에 있다. 최첨단 미세회로 반도체 생산에 필수적인 극자외선(EUV) 노광 장비를 생산하는 세계 유일의 기업 ASML이 네덜란드에 있다. 애플 아이폰 프로세서와 엔비디아 인공지능(AI) 학습 칩을 위탁 생산하는 TSMC, 세계 1위 메모리 기업 삼성전자, CPU 대표 기업인 인텔 등이 ASML의 장비를 필요로 한다. 네덜란드 정부는 앞서 미국의 중국 반도체 제재에 동참, ASML EUV 장비의 중국 수출을 막는 등 중국과 거리를 두고 있다. 자국 대표 기업 ASML이 최대 시장 중국에서 입지가 약해지는 상황을 감수하고 내린 결정이다. 혁신에 뒤쳐진 대가넥스페리아 건은 70년 동안 한 번도 시행되지 않은 법률을 꺼내 직접 민간 기업 활동에 개입했다는 점에서 더욱 명시적으로 이 싸움에 참여하겠다는 의지로 풀이된다. 냉전 시대에도 적용하지 않은 법을 지금 끄집어 낼 정도로 현재 상황을 심각하게 보고 있다는 것이다. 첨단 기술과 디지털 플랫폼을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과거 냉전과 비슷한 성격을 갖고 있음을 보이는 징후이기도 하다. 글로벌 자유 무역과 분업, 공급망 의존을 통해 더 평화롭고 번영하는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기대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질서를 맞이하고 있다. 앞서 영국도 안보를 이유로 웨일스 뉴포트에 있는 넥스페리아 생산 공장의 지분을 매각하게 한 바 있다. 프랑스도 중국 영향 아래 있는 반도체 기업에 비슷한 조치를 취한 적이 있다. 이런 조치는 중국 같은 전체주의 국가의 확장을 막고 자유 민주주의 블록을 지키려는 의도를 내세운다. 하지만 중국이 넥스페리아 통제를 강화하고 제품 수출을 막아 자동차 부품 공급망이 마비될 위험이 우려되는 것에서 보듯, 오히려 우려하던 공급망 안보 붕괴나 지적재산 유출을 더 빠르게 할 가능성도 있다. 세계는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고, 그 결과는 거대한 블록으로 분열된 세계일 수 있다. 애초에 넥스페리아가 중국 자본에 넘어가지 않았다면 현재 이런 문제를 피할 수도 있었을까? 넥스페리아는 네덜란드 글로벌 전자 기업 필립스가 2006년 반도체 사업을 분리해 사모펀드에 매각하며 설립된 NXP에서 다시 2016년 분리돼 탄생한 회사다. NXP가 넥스페리아를 중국 정부 소유 기업이 낀 투자사에 넘겼고, 이를 다시 윙텍이 인수하며 중국 지배가 확고해졌다. 이를 되돌리기 위한 모험을 지금 네덜란드는 하고 있다.일찍이 1920년대 진공관을 생산했던 첨단 기업 필립스의 반도체 사업이 미국, 일본, 한국 등에 밀리면서 재무적 투자자에 넘어간 결과다. 혁신에 뒤쳐진 대가는 이런 식으로 치러진다.

2025.10.26 13:00

4분 소요
기관의 스타트업 해외 진출 지원…부모 손 잡는 ’하향식 지원’ 지양해야 [최화준의 스타트업 인사이트]

전문가 칼럼

“다 큰 성인이 부모 손을 붙잡고 해외로 여행을 간다면 얼마나 웃긴 일인가.”얼마 전 한국을 방문한 글로벌 스타트업 생태계 전문가는 국내 스타트업이 기관 지원에 의존해 해외 시장에 진출하는 방식을 그렇게 비유했다. 그는 이런 해외 진출 방식은 한국 스타트업이 경쟁력이 부족하다는 인상을 글로벌 시장에 심어줄 것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특히 한번 시장에 각인된 부정적 인상을 바꾸려면 한국은 미래에 더 많은 기회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스타트업 글로벌 교류는 상향식으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를 경험한 해외 전문가들은 고질적 문제로 다단계 지원 구조를 꼽는다. 현 구조에서는 공적 영역과 같은 최상위 집단이 해외 진출 국가를 정하고 이에 맞추어 하위 관계 및 관련 조직들이 주어진 역할을 수행한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은 하향식(top-down)으로 이루어지는데 이 과정에서 긴 시간과 많은 자원이 소모된다. 문제는 이런 방식으로는 스타트업 생태계의 변화하는 속도를 따라잡기 어렵다는 점이다. 스타트업 생태계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변화한다. 현재 스타트업 생태계에 자리 잡은 하향식 다단계 지원 구조는 이러한 변화를 예측하고 선제적으로 대응하기에 알맞지 않다. 국내외 스타트업 생태계 전문가들은 대기업을 위한 생태계 구축 방식을 왜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도 적용하고 있는지 하나같이 의문을 보였다. 내부 체계를 자세히 살펴보면 국내 스타트업 지원 구조는 제조 대기업이 전유하고 있는 가치 사슬과 유사하다. 실제로 국내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 지원 구조와 대기업의 가치 사슬 구조 모두 상하청 갑을 관계로 얽혀 있다. 그들은 현재 다단계 형태의 가치 사슬에 여러 스타트업 지원 조직들이 생존하고 있는 부분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흐름이 고착화되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해외 진출은 유의미한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조언했다. 해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창업자와 스타트업이 주도하는 상향식(bottom-up) 해외 진출을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스타트업 생태계 지원 기관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지원 부서일 뿐, 그들이 모든 것을 직접 운영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해외 스타트업 생태계는 상향식 지원을 통해 글로벌 교류의 성공 사례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 스타트업은 더 높은 기업 가치와 더 많은 투자금 회수 기회를 찾아 자발적으로 미국으로 회사를 옮긴다. 유럽의 창업 선도국 에스토니아는 전자시민권(e-Residency)을 발급해서 디지털 노마드를 실현하려는 전 세계 창업자를 자국으로 끌어들이고 있다. 글로벌 금용 허브 싱가포르는 낮은 세금과 높은 글로벌 개방성을 앞세워 아시아와 유럽의 벤처 캐피털(VC) 기업과 창업자를 성공리에 유치했다. 이러한 해외 성공 사례들은 지원 기관에서는 제도적 유인책만을 제공하고, 스타트업 생태계 운영에는 관여하지 않은 덕분에 나온 결과이다. 글로벌 교류를 추구하는 스타트업 행사 역시 창업자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글로벌 스타트업 행사 슬러쉬(Slush)는 핀란드 대학 창업 동아리의 소규모 모임에서 시작되었다. 스페인어권 최대 스타트업 행사 사우스서밋(South Summit)은 스페인 마드리드 출신의 한 여성 창업자에 의해 출범되었다. 인기를 얻고 규모가 글로벌로 커지면서 이제는 공공 영역의 지원과 도움을 받고 있지만, 출발은 모두 스타트업 생태계 구성원들의 자발적인 아이디어였다. 스타트업의 해외 진출은 탐험가처럼일반 기업 생태계와 스타트업 생태계가 성장하는 방식은 다르다. 해외 진출 전략 역시 마찬가지이다. 기업은 수요가 충분한 해외 시장을 선정하고 그곳에 거점을 마련한다. 이는 목표를 정해서 행동하는 사냥꾼과 같다. 반면 스타트업은 탐험가와 같다. 해외 진출의 목적은 진출 국가의 시장 잠재성을 알아보기 위함이다. 현지 시장 반응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면 스타트업은 재빠르게 다른 국가로 눈길을 돌린다. 기회와 가능성을 포착해야 비로소 베이스캠프를 차리고 정복을 시작한다. 이처럼 해외 진출을 도모하는 스타트업은 즉시 접근 가능한 자원을 찾아 새로운 곳을 찾아 헤매는 탐험가와 같다. 업계 관계자들은 국내 스타트업 해외 진출 지원 기관의 역할은 베이스캠프 정도까지라고 입을 모은다. 실제로 글로벌 무대에서 성공을 거둔 대다수 한국 스타트업들은 해외 시장에 근거지를 차리고 자력으로 성장했다. 예를 들면 헬스케어 스타트업 눔, 채팅 소프트웨어 스타트업 센드버드, AI 애드테크 플랫폼 몰로코 등이 그 주인공이다. 모두 해외 시장에서 자생력을 보여주면서 유니콘으로 성장한 한국계 해외 스타트업이다. 스타트업에게 해외 진출 기회를 제공하고 채널을 확대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지원 사격은 그 정도까지가 적절하다. 굳이 그들의 손을 붙잡고 나라 밖으로 나아가 함께 사냥까지 할 필요는 없다. 붙잡은 손을 놓아도 스타트업들은 스스로 알아서 탐험을 시작할 것이다. 누군가는 탐험을 단기간에 마치고 빈손으로 돌아올 것이고, 다른 누군가는 긴 탐험 끝에 양손 가득 무엇인가를 들고 올 것이다. 무엇을 가져올지도 결국은 그들이 정할 일이다.

2025.10.26 10:00

3분 소요
‘자유무역’ APEC과 ‘관세왕’ 트럼프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오는 10월 31일과 11월 1일 경북 경주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리는데요, 한국에서 열리는 건 2005년 부산 이후 20년 만에 두 번째입니다. 1989년 설립된 APEC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지속 가능한 경제 성장과 번영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회원은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과 투자를 증진하고, 지역경제 통합을 가속화하며, 경제 및 기술 협력을 장려하고, 지속 가능하고 더 나은 비즈니스 환경을 조성하는 데 노력하기로 했습니다. 역동적이고 조화로운 아시아·태평양 공동체를 구축하고자 뜻을 모은 회원국은 21개국인데요, 세계 인구의 37%, 상품 교역량 50.9%, GDP의 61.3%를 차지하는 등 세계 경제의 절반 이상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뜻을 모은 회원국 중에는 미국도 있지만, 올해 1월 재집권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미국은 APEC과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마가, MAGA)라는 깃발을 높이 들고 자국 우선주의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 있는데요, 대표적인 것이 관세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4월부터 모든 국가에 10%의 일괄 관세를 부과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자국과의 무역수지 흑자가 큰 국가에는 11~15%의 상호 관세를 추가로 적용했습니다. 또 철강·알루미늄·구리 등 전략적 물자에는 최고 50%의 고율 관세를 부과했으며, 자동차 및 반도체, 의약품 등에도 각각 25~100%의 높은 관세를 신설했습니다. 기존 800달러 이하의 소액 수입 면제도 지난 8월 폐지해 온라인 직구 등 모든 소액 물품에 관세를 부과하고 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인력 교류의 장벽도 높였는데요, 지난달 자국민 고용 확대를 명분으로 전문직 비자(H-1B) 수수료를 기존 1000달러에서 10만 달러(약 1억3990만원)로 100배 인상해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해외 전문 직종자의 미국 내 자유로운 취업을 제한했습니다. 트럼프 대통령의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를 앞세운 강도 높은 보호무역은 자유롭고 개방된 무역과 경제 및 기술 협력이라는 APEC의 방침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입니다. 자유무역의 세계 리더인 미국이 ‘反APEC’의 길에 설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는데,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지고 있어 충격적일 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관세폭탄을 맞은 국가들은 경기 둔화에 실업률이 상승하고 있고, 세계 경제 성장률 하락, 금융시장 불안 등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했습니다. 100%가 넘는 관세폭탄을 주고받고 있는 중국과의 극한 관세전쟁은 반도체·희토류 등을 무기로 한 자원 전쟁으로 이어지며 세계 공급망까지 흔들어 교역국들을 어려움에 빠뜨렸습니다. 미국과의 관세협상을 타결하지 못한 한국도 예외가 아닌데요, 고율 관세가 현실화하면서 미국 수입국 순위가 작년 7위에서 올해(1~7월) 10위로 밀려났습니다. 특히 직격탄을 맞은 한국의 수출 품목은 자동차인데, 1~9월 누적 대미 수출액은 전년 동기보다 14.4%나 감소했습니다. ‘관세왕’이라는 별명까지 붙은 트럼프 대통령의 APEC 정신에 반하는 관세전쟁에 미국 내에서도 “역사상 가장 어리석은 무역전쟁”이라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지만 그가 방향을 틀 가능성은 없어 보이는데요, 이번 APEC 기간에도 방한해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관세전쟁을 벌이며 분위기를 망치지 않을까 우려됩니다. 부디 모든 회원국이 이번 주제인 연결과 혁신, 번영을 통한 지속 가능한 내일에 대한 진지한 논의와 합의를 이루길 바랍니다. 나와 우리를 위해!

2025.10.26 06:00

3분 소요
잠시 멈춘 시장, 더 깊어진 불안과 분노[김현아의 시티라이프]

전문가 칼럼

10월 15일, 정부가 발표한 세 번째 부동산 대책은 시장에 대한 일종의 봉쇄령이었다. 서울과 경기 12개 지역을 토지거래허가구역으로 지정하고, 고가주택 대출 한도를 절반으로 줄였으며, 전세대출도 막혔다. 정부는 이를 “투기 수요 억제”라 설명했지만, 현장에서 대책은 투기수요와 실수요자를 구별하지 않았다. 집을 사려던 신혼부부는 대출 승인이 취소됐고, 전세 만기를 앞둔 세입자는 갑자기 계약을 포기해야 했다. 부동산 앱의 거래창에는 ‘거래보류’, ‘계약취소’ 문구가 잇따랐다. 이들은 투기꾼이 아니라 몇년 동안 저축한 돈으로 내 집마련을 하기위해 부족분을 대출로 충당하려던 일반 시민이다. 이제 집을 사거나 빌릴때 대출을 이용하는건 상식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전세계 어디에도 대출없이 자기자본으로 집을 사는 나라는 없다. 그런데 가뜩이나 집값이 비싼 서울과 경기 일부 지역의 대출을 막은 것이다. 정부대책으로 가장 먼저 멈춰 선 것은 평범한 시민의 일상이었다.정책은 때로 강제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강제가 설득력을 가지려면 공감 가능한 명분이 필요하다. 지금의 서울 집값 상승은 단순한 투기가 아니라 구조적 결과다. 일자리와 교육, 교통, 문화, 인프라가 집중된 도시의 가치가 그대로 가격에 반영된 것이다. 사람들은 서울에서 부동산을 통해 돈을 벌고 싶은 것이 아니라, 서울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비싼 집을 감수한다. 그래서 인구 감소시기에도 서울의 집값이 유지되는 것이다. 아니 서울을 대체하는 그 어느것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서울의 집값이 더 오르는 것이다. 이 근본적인 사실을 무시한 채 거래를 통제하는 것은 결과를 원인으로 착각한 처방이다.실수요자들의 좌절, 현실과 시장을 모르는 말말말정부가 시장을 ‘잠시’ 멈추게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멈춤의 시간마다 사람들은 더 불안해졌다. 대출을 옥죄고 세금을 늘려도 결국 ‘거래를 포기하는 건 서민이고 실수요자’들이다. 서울의 대출을 옥죌때마다 서울 주택의 구매자들은 현금부자와 외국인들로 채워졌고, 부자들의 자녀에 대한 주택증여는 늘었다. 높아진 세금은 전세주택을 월세로 전환시키면서 세입자의 임대료에 그대로 전가됐다. 특히 이러한 현상은 문재인 정부 당시 드러났던 가까운 과거의 일이다. 그런데도 동일한 정책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반복되고 있다. 진짜 국민들을 분노케하는 것은 정책의 내용보다 그것을 설명하는 정책 당국자의 ‘말’이다. 부동산 정책의 실직적인 책임자라고 볼 수 있는 국토교통부의 차관은 “지금은 집을 사지 말고 돈을 모아 나중에 사라”고 말했다. 과거 “모두가 강남에 살 필요는 없다”, “실제 거주하고 있는 주택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분하라”고 했던 정당의 정치인과 관료들이 모두 강남에 집을 보유하고, 거주주택이 아닌 주택을 보유하고 있다. 정부가 집을 사지 말라고 했던 그 시기에 집을 산 사람은 모두 자산가치가 상승했지만 정부를 믿고 기다렸던 사람들은 내집마련이 더 요원해졌다. 그 ‘나중’은 영영 오지 않았다. 조세정책 책임자는 “보유세를 높이면 버티지 못하고 팔게 될 것”이라 했다. 여당과 대통령실은 신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내고 있지만 국민들 입장에선 ‘겁박’이긴 마찬가지다.통제에도 품격이 필요하다루즈벨트 대통령은 1933년 대공황 당시 ‘뱅커스 할리데이’(Bank Holiday)를 선포했다. 당시 미국은 은행 도산이 연쇄적으로 번지던 시기였다. 루즈벨트는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는 법률, 즉 1917년 적국거래법(Trading with the Enemy Act) 제5조 (b) 항에 근거해 모든 은행을 4일간 일시 폐쇄했다. 이후 긴급법(Emergency Banking Relief Act)을 의회가 통과시키면서 은행의 건전성을 신속히 점검했고, 건전하다고 판정된 은행부터 영업을 재개했다. 그는 이 조치를 ‘휴일’이라 불렀다. 국민에게 “이건 위기가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점검의 시간”이라고 설득했기 때문이다. 이 비상조치는 단순한 통제가 아니라 명분·절차·사후 책임이 모두 갖춰진 행정적 신뢰 회복의 모델이었다. 문제는 지금의 한국 정부가 그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다는 점이다. 10·15 대책의 핵심인 토지거래허가구역 지정은 법적으로 지자체장의 권한이다. 그러나 서울시는 발표 하루 전날에야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정책의 폭력성은 때로 불가피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폭력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명분이 있어야 하고, 절차가 투명해야 하며, 사후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 이번 대책은 이 세 가지 모두가 결여됐다. 더 큰 문제는 거래를 멈춘 이후다. 정부가 멈춘 시장을 언제, 어떻게 다시 움직일지에 대한 청사진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루즈벨트가 4일의 ‘휴일’을 통해 신뢰를 회복했다면, 우리는 1년 가까운 ‘정지 상태’ 속에서도 불신만 깊어지고 있다. 불가피한 멈춤이라면 그 시간 동안 무엇을 고칠지, 어떤 질서로 회복할지를 제시했어야 했다. 그러나 정부는 결과만 통제하고, 과정과 방향은 비워뒀다. 아무런 책임도, 설계도 없었다.서울 집값이 여전히 비싸지만, 그 안에는 단순한 콘크리트가 아니라 ‘기회의 농도’가 있다. 외곽으로 가면 집은 싸지만 일자리와 교육, 의료 접근성이 떨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불편한 삶 대신 비싼 삶을 택한다. 그 선택은 욕심이 아니라 생존의 전략이다.근본적인 해법은 서울의 집값을 억누르는 것이 아니라 서울 밖의 선택지를 키우는 일이다. 수도권 외곽과 지방의 주거환경, 교통, 일자리 인프라가 서울 수준으로 개선된다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이동한다. 그러나 신도시들은 30년째 자족기능을 갖추지 못하고, 광역교통망은 약속으로만 진행중이다. 지역의 삶이 서울의 대체제가 되지 못하는 한, 서울의 집값은 어떤 규제에도 다시 오른다. 서울이 아닌 곳에서도 살아볼 만한 이유를 만들지 못한다면, 이번 대책은 또 다른 위기의 예고편일 뿐이다.집값이 아니라 삶의 지리를 바꾸는 것, 그것이 진짜 부동산 정책이다.

2025.10.2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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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8학년도 대입 대전환…‘학교 수업의 힘’ 커진다 [임성호의 입시지계]

전문가 칼럼

2028학년도 대학입시가 수능·내신 제도 전면 개편과 고교학점제 시행으로 대입 역사상 가장 큰 변화를 맞이한다. 수능에서는 문·이과 구분이 완전히 사라지고, 수학은 사실상 인문계 범위 안에서 출제된다. 사회탐구(사탐)와 과학탐구(과탐) 과목도 구분 없이 모두 두 과목을 응시해야 하며, 출제 범위는 고1 수준의 통합사회·통합과학으로 좁혀진다. 시험 범위가 줄면서 수험생 부담은 줄지만, 전공별 학업 역량을 수능만으로 정확히 평가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도 함께 제기된다.이번 개편은 단순한 과목 조정이 아니라 수능과 내신, 그리고 고교학점제가 동시에 맞물리는 구조적 변화다. 대학별 수시·정시 전형계획은 통상 수험생이 고2가 되는 해 4월 말에 확정되지만, 현 고1이 적용받는 2028학년도 입시는 변화 폭이 워낙 커 주요 대학들이 이미 전형 일부를 앞당겨 발표하고 있다.정시에서 내신으로서울대가 최근 공개한 2028학년도 전형계획의 핵심은 ‘정시에서의 내신 비중 확대’다. 서울대 정시는 일반전형 기준으로 1단계와 2단계로 나뉜다. 1단계에서는 수능 성적으로 선발하며, 지금까지는 표준점수를 기준으로 모집정원의 2배수를 뽑았다. 하지만 2028학년도부터는 선발 인원을 3배수로 늘리고, 평가 방식도 표준점수에서 등급 점수로 바꾼다.수능 성적은 등급·백분위·표준점수 등 세 가지 방식으로 발표된다. 등급은 9등급제로 구분되고, 백분위는 100점 만점으로 산출된다. 표준점수는 난이도에 따라 보정되는 수치로, 복잡한 계산식을 거쳐 산정된다. 이론상 만점은 200점이지만 실제 최고점은 150점 안팎에서 형성된다. 한 문제 차이로 점수가 크게 달라지기 때문에 변별력은 표준점수가 가장 높고, 다음이 백분위, 그 다음이 등급 순이다.이런 점을 고려하면 서울대가 1단계 평가에서 표준점수 대신 등급 점수를 적용하기로 한 것은 사실상 수능의 영향력을 줄이는 조치로 해석된다. 현재는 수능 80%, 내신 20% 비율로 2단계 합격자를 선발하지만, 2028학년도부터는 수능을 백분위 점수로 전환하고 반영 비율도 수능 60%, 내신 40%로 조정된다. 내신 비중이 외형상 대폭 확대되는 셈이다.다만 내신 40%가 어떤 방식으로 반영될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공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학교 내신 상위 10% 이내에 들지 못한 학생들은 수능을 잘 보더라도 서울대 정시 합격 문턱을 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또한 내신 평가 방식이 9등급제에서 5등급제로 전환되면서, 전 과목에서 상위 10% 이내에 속하는 ‘1등급’ 학생이 약 7,000명 수준으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서울대 지원자는 대부분 1등급권에서 경쟁하게 된다. 동일 등급 내 학생들 사이에서는 고교학점제 이수과목이나 세부능력 특기사항 등 서류 평가가 변별 요소로 작용할 수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수능 백분위 점수가 당락을 결정짓는 요인이 될 가능성도 있다. 서울대 입시 전략은 혼돈이처럼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전형이 시행되는 만큼, 수험생이 서울대 입시 전략을 세우기란 쉽지 않다. 기존 입시 결과를 참고할 통계자료가 전무하기 때문이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도 “2028학년도 대입은 예측 불가능성 자체가 리스크”라는 평가가 나온다.한편 내신 성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해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준비하던 학생들의 전략에도 변화가 예상된다. 서울대는 이미 2023학년도부터 정시에서 내신을 반영하고 있다. 그 첫해에는 내신 반영 부담으로 검정고시 출신 합격자가 2022학년도 33명에서 22명으로 줄었지만, 2024학년도에는 32명, 2025학년도에는 36명으로 다시 늘었다. 이는 내신 반영이 불리하더라도 수능 고득점자라면 충분히 합격권에 진입할 수 있다는 의미다.따라서 2028학년도에도 내신 비중이 커지더라도 수능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이 대거 탈락할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실제 서울대 입시 추세를 보면, 여전히 수능의 영향력이 최종 당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입시 전문가들은 서울대 정시 1단계 통과를 위해선 ▲국어 ▲영어 ▲수학 ▲사탐 ▲과탐 ▲한국사 등 6개 영역 평균 1.6등급 수준이 필요할 것으로 전망한다. 이는 서울대뿐 아니라 ▲의대 ▲치대 ▲한의대 ▲약대 등 주요 모집단위의 경쟁률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추정치다.내신이 40% 반영되는 2단계에서는 고교 내신 5등급 체제를 기준으로 1.2등급 이내 학생들 간의 치열한 접전이 예상된다. 현재 내신 9등급제에서는 상위 4%가 1등급이지만, 2028학년도부터는 상위 10%까지 1등급으로 분류돼 1등급 인원이 두 배 이상 늘어난다. 그만큼 내신 1등급권 내에서의 미세한 차이가 합격을 가를 수 있다.결국 서울대 정시에서는 내신 1등급 학생들 간에도 수능 백분위 점수의 세밀한 차이가 당락을 좌우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교육계에서는 “학교 수업의 충실도와 수능 실력을 동시에 요구하는 이중 경쟁체제가 만들어질 것”이라며 “수험생과 학교 모두 준비 전략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하는 시점”이라고 입을 모은다.

2025.10.2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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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적 공간이 만드는 영구적 가치 [순화동필]

전문가 칼럼

팝업스토어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며 빠르게 진화하고 있다. 지난해 국내에서만 1700개 이상의 팝업스토어가 문을 열었다. 성수동 연무장길에서는 한 매장 건너 하나씩 팝업스토어를 마주칠 정도로 붐빈다. 더현대서울에서는 단일 팝업스토어가 10일 만에 34억원의 매출을 기록했다. 네이버 검색량도 최근 3년 사이 무려 800%나 급증했다. 이제 거의 모든 기업과 브랜드가 팝업스토어 실행을 고민하며, 그 효과를 직접 체감하고 있다.그러나 단순히 ‘열면 성공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SNS 후기를 살펴보면 “이제 지겹다” “기대보다 밋밋하다” “허무했다”는 반응도 적지 않다. 수천만 원을 투입하고도 기대했던 매출은커녕 브랜드 이미지에 손상을 입는 사례도 속출한다. 그렇다면 성공과 실패를 가르는 팝업스토어의 결정적 요인은 무엇일까.일시적 공간의 역설적 힘팝업스토어의 진짜 힘은 어디에 있을까. 본래 매장은 이미 고객과의 오프라인 접점 역할을 해왔다. 그럼에도 팝업스토어가 특별한 이유는 ‘한정된 시간, 한정된 공간, 한정된 경험’이 만들어내는 긴장감 때문이다. 이 제약이 오히려 브랜드에게는 무한한 실험의 자유를 제공한다. 오래 유지되어야 하는 매장의 제약에서 벗어나, 브랜드의 철학과 정체성을 트렌드에 맞춰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실험실이 되는 것이다.성공적인 팝업스토어들은 공통점을 지닌다. 단순한 판매 공간이 아니라 ‘경험의 무대’로 설계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G-DRAGON의 앨범 발매 기념 팝업은 더현대서울의 세 개 층을 통째로 사용해 오랜 공백을 뛰어넘는 아티스트의 세계관을 현실에 구현했다. 방문객은 단순히 제품을 구매하는 소비자가 아니라, 아티스트의 감성과 메시지를 온몸으로 체험하는 참여자가 됐다.팝업스토어의 효과를 객관적으로 평가하려면 명확한 KPI(핵심성과지표) 설정이 필요하다.목표가 불분명하면 대부분 실패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팝업스토어를 한 번 여는 데 최소 수천만 원에서 많게는 수억 원이 투입되지만, 온라인 마케팅만큼의 노출 도달이나 투자 대비 수익(ROI)을 달성하기는 쉽지 않다.팝업스토어의 가치를 단순히 판매금액으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브랜드 인지도 상승, 고객 경험 만족도, 소셜미디어 확산 효과, 장기적 고객 관계 강화 등 다양한 요소를 함께 고려해야 한다. 실제로 성공적인 사례들은 이런 복합적인 목표를 달성하고 있다.한 신생 뷰티 브랜드의 경우, 제한된 예산으로 목표 방문객 수의 308%를 달성했고, 매출 목표도 133%를 초과했다. 핵심은 명확한 타깃 설정과 그들의 니즈를 반영한 경험 설계였다.흥미로운 점은 예산 규모와 성공이 반드시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9000만원을 들인 아식스 팝업과 3억원대 예산을 투입한 다른 팝업 모두 각자의 목표에 맞는 성과를 냈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쓰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전략적으로 쓰느냐”였다. 팝업스토어 성공의 여섯 가지 법칙모든 마케팅이 그렇듯, 보장된 성공은 없다. 그러나 수백 건의 사례를 분석해보면 실패 확률을 줄이는 법칙은 존재한다. 하나는 명확한 목적과 타깃 설정이다.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겠다”는 접근은 실패로 이어진다. 구체적인 페르소나를 설정하고, 그들만을 위한 경험을 설계해야 한다.위치와 타이밍의 전략적 선택도 중요하다. 단순히 유동인구가 많은 곳보다, 타깃 고객이 자연스럽게 머무는 장소를 찾아야 한다. 예컨대 윌슨의 테니스 라켓 팝업은 ‘코리아 오픈’ 기간 중 올림픽공원에서 진행돼 높은 시너지를 냈다.차별화된 브랜드 경험을 설계할 필요도 있다. 방문객이 “다녀왔다”가 아니라 “경험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또 적정 예산 설정을 명확히 해야한다. 많은 예산을 쓴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목적에 맞는 최적 규모를 찾아야 한다.다음은 디지털 연계 전략이다. 팝업스토어는 오프라인 경험의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온라인 확산과 지속적인 관계 유지를 염두에 둬야 한다. 또 고객 중심의 현장 운영도 필수다. 완벽한 공간 디자인도 현장 경험이 나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결국 팝업스토어의 성공은 “예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의 서사를 얼마나 진정성 있게 전달하느냐”에 달려 있다.브랜드 DNA에 맞는 전략이 필요하다물론 모든 브랜드에 똑같은 팝업 전략이 통하는 것은 아니다. ▲인지도 ▲예산 ▲목적 ▲카테고리에 따라 접근법이 달라져야 한다. 인지도가 높고 예산이 충분한 브랜드는 플래그십형 팝업스토어로 브랜드의 총체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다. 반면 신생 브랜드는 캠페인형 팝업스토어를 통해 인지도 확산에 집중하는 것이 효과적이다.팬덤 기반 콘텐츠 브랜드는 세계관 구현에 초점을 맞추고, 굿즈 판매를 통해 높은 매출을 기대할 수 있다. 테크 브랜드는 기능성과 혁신성을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구조가 바람직하다. 이처럼 브랜드의 특성과 시기, 타깃층에 맞는 전략적 설계가 필수적이다.팝업스토어 열풍은 단순한 유행이 아니다. 이는 소비자들의 소비 패턴 변화인 소유보다 경험, 대량보다 한정, 획일보다 개성을 중시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결과다. 경험 소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단순 유통 중심의 오프라인 매장은 줄고, 브랜드 메시지를 체험할 수 있는 팝업과 전시 중심의 공간은 늘어나고 있다. 팝업스토어는 오프라인 유통의 진화 방향을 보여준다.다만 지금의 무분별한 팝업스토어 난립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가치를 전달하지 못하는 팝업은 시장에서 도태될 것이다. 살아남는 것은 브랜드 본질을 명확히 드러내고, 고객에게 감동을 주는 진정성 있는 팝업스토어뿐이다.앞으로의 팝업스토어는 더 정교해질 전망이다. 데이터 기반 고객 분석, AI를 활용한 개인화된 경험, 메타버스와 연계한 하이브리드 공간 등 기술과 감성의 융합이 가속화될 것이다.팝업스토어의 성패를 가르는 핵심은 결국 ‘진정성’이다. 브랜드가 진정으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고객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가치가 명확해야 한다. 화려한 인테리어나 인기 장소보다 중요한 것은 브랜드와 고객 사이의 진정한 연결이다.팝업스토어는 분명 효과적인 도구다. 하지만 그 효과는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철저한 기획과 전략적 사고, 그리고 고객에 대한 깊은 이해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일시적인 공간이 영구적인 브랜드 가치로 확장될 수 있다.오늘도 수많은 브랜드가 새로운 팝업스토어를 준비하고 있다. 결국 질문은 하나로 귀결된다.“당신의 팝업스토어는 고객에게 무엇을 남길 것인가.” 그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하다면, 그 팝업스토어는 이미 절반의 성공을 거둔 셈이다.리스페이스는 2024년 연 매출 100억 원을 달성하며 국내 팝업스토어 업계의 선두주자로 자리 잡았다. 현재 약 70명의 인력이 연간 50~60여 개의 팝업스토어와 전시 프로젝트를 수행하고 있다.기획부터 운영까지 전 과정을 내부에서 처리하는 풀 인하우스(Full In-House)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리스페이스는 이를 통해 브랜드와 소비자 간 깊은 연결을 만드는 데 집중하고 있다. 필자는 연세대학교 재학중 리스페이스를 창업했다. 정주영 창업경진대회를 입상하고 연세대학교 창업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12년 동안 리스페이스를 운영했고,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회사를 성장시켰다. 지난해에는 40개 이상의 팝업스토어를 열고, 연매출 100억 이상을 달성하는 등 팝업스토어 분야를 선두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2025.10.2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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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허브로 진화하는 싱가포르, 한국 기업의 전략적 교두보 되나 [동남아시아 투자 나침반]

전문가 칼럼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에서 운영하는 코리아스타트업센터(K-Startup Center Singapore)는 ‘싱가포르 인공지능(AI) 정부정책 및 주요 산업별 AI 기술동향’이라는 보고서를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관련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발간하였으며, 이번에는 이 보고서를 바탕으로 싱가포르 AI 정책 및 한국 기업의 진출 전략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싱가포르가 AI 강국을 향해 속도를 높이고 있다. 2023년 발표된 National AI Strategy 2.0(NAIS 2.0)은 “공익을 위한 AI(AI for the Public Good)”라는 비전을 내세우며, 단순한 기술 도입을 넘어 윤리와 신뢰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 AI 허브로 도약하겠다는 전략을 분명히 했다. 디지털 경제가 이미 GDP의 17.7%를 차지하는 싱가포르는 2030년까지 AI 시장 규모만 약 160억 달러(22조원)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작은 도시국가가 동남아 전체 AI 확산의 실험장이자 교두보로 주목받는 이유다. 이 전략은 단순히 기술 경쟁력 확보를 넘어서, 국제 사회에서 싱가포르가 ‘신뢰할 수 있는 AI 국가’로 자리매김하려는 포석으로도 볼 수 있다.정부 주도의 강력한 생태계싱가포르 AI 생태계의 가장 큰 특징은 정부의 정책 주도와 민간 혁신의 결합이다. GovTech, IMDA, A STAR 같은 공공기관이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며, AI Verify와 같은 신뢰성 검증 툴킷으로 기업의 윤리적 기준 준수를 지원한다. 호프스태터가 ‘괴델, 에셔, 바흐’에서 강조한 ‘기묘한 고리’(Strange Loop)처럼, 싱가포르의 AI 생태계도 정부 정책–산업–규제의 상호작용 속에서 반복적 순환을 이루며 점점 더 고차원적인 혁신을 만들어낸다. 단순한 정책의 나열이 아니라, 서로를 비추고 강화하는 루프 구조가 새로운 창의성을 낳고 있는 셈이다. ▲의료∙바이오 헬스 ▲핀테크 ▲공공 행정 ▲스마트 모빌리티 ▲스마트 제조 ▲에듀테크 ▲ 인프라 등 7대 분야를 AI 주요 사업군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의료와 공공 행정은 정부 주도의 강력한 수요 창출로 고성장을 보이고 있고, 핀테크는 규제 샌드박스를 통해 혁신과 리스크 관리가 병행되고 있으며, 경쟁이 치열하고 이미 시장이 성숙기에 접어들어 폭발적 성장보다는 고도화 중심으로 전환중이다. 스마트 제조·모빌리티 분야는 아직 초기 단계지만 성장 잠재력이 크다. 정부는 AI 인재 양성에도 집중하고 있으며, 대학과 연구기관, 민간 기업이 공동으로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해 2026년까지 1만 5000명의 AI 전문 인력을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글로벌 기업과 현지 산업의 교차점싱싱가포르는 AI 생태계 확장을 위해 향후 5년간 10억 SGD(1조1000억원) 이상을 투자한다. GPU 기반 데이터센터 확충, 국제 공동 프로젝트, 전문 인재 육성이 핵심이다. 이 과정에서 구글, 마이크로소프트 같은 글로벌 기업이 AI 인프라를 제공하고, 현지 스타트업은 특화 영역에서 혁신을 주도한다. 바흐의 푸가가 단순한 선율의 반복 속에서 복잡한 음악적 구조를 만들어내듯, 싱가포르의 AI 정책도 각 산업에서 단편적 혁신을 쌓아 올려 점차 사회 전체를 아우르는 복합적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 AI는 여전히 규칙 기반 알고리즘의 집합이지만, 그 적용 범위가 넓어질수록 인간의 창의성에 가까운 산출을 흉내 내며 산업에 깊이 스며들고 있다.한국 기업에 싱가포르는 단순한 시장이 아니라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다. 첫째, 공공 테스트베드를 활용한 실증 경험은 곧 신뢰 자산으로 전환되어, 베트남·말레이시아 등 인근 시장 확장의 발판이 된다. 둘째, 자연어처리(NLP), 의료 영상, 예지정비 같은 틈새 분야에서 특화 기술을 적용하면 차별화를 이룰 수 있다. 셋째, 정부와 글로벌 빅테크가 주도하는 협력 구조 속에서 파트너십 중심 접근이 필수적이다. 독자적 진출보다는 공동 프로젝트 참여가 성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괴델이 보여준 정리처럼, 어떤 체계도 스스로를 완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AI 역시 기술 그 자체로는 자기완결적이지 않다. 싱가포르가 ‘공익을 위한 AI’를 내세우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기술이 사회적 맥락, 윤리적 틀과 결합할 때 비로소 지속 가능한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나라·큰 실험실…한국 기업이 배워야 할 것들 싱가포르는 국토는 작지만, AI 정책·규제·산업을 아우르는 거대한 실험실로 기능하고 있다. 윤리적 기준과 신뢰를 강조하는 이 시장은 단순한 기술 판매처가 아니라 혁신 모델을 검증하고 확산할 수 있는 플랫폼이다. 에셔의 그림 속 끝없이 이어지는 계단처럼, AI는 반복과 규칙을 기반으로 끝없이 확장된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적 창의성과 동일한지는 여전히 열려 있는 질문이다. 한국 기업이 자사의 기술을 싱가포르 특화 분야에 접목하고, 글로벌 네트워크와 함께 이 ‘기묘한 고리’에 참여한다면, 동남아 AI 시장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2025.10.19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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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검정고무신’은 왜 불공정계약의 대명사가 됐나[백세희의 컬처&로(LAW)]

전문가 칼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검정고무신’이라는 단어는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아련하고 따뜻한 느낌을 줬다. 2023년 3월 만화 ‘검정고무신’의 원작자 고(故) 이우영 작가가 스스로 세상을 등지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안타깝게도 이제 ‘검정고무신’은 저작권 분쟁과 불공정계약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 같다.‘검정고무신’은 1992년부터 2006년까지 만화 잡지 에 연재된 작품이다. 이 작가가 군 복무 중이던 1992년 무렵에는 동생인 이우진 작가가 그림을 그렸다. 만화는 단행본으로 45권이나 만들어졌고 애니메이션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서울에서 살아가는 어린이 기영과 청소년 기철, 그리고 그 가족들의 이야기를 코믹하면서도 정감있게 묘사해 지금까지도 대중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런 애틋한 만화가 어쩌다가 창작자에게 좌절과 고통을 주게 된 것일까. 원인은 잘못된 계약에 있다. 작가의 신뢰는 쉽게 배반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를 되돌리는 길은 가시밭길을 걷는 것만큼이나 힘들었다.‘비극의 시작’이 된 출판사의 제안2007년 H출판사 측(이하 ‘출판사’)에서 이 작가 측(이하 ‘이 작가’)에 소위 ‘사업권’을 설정하는 계약의 체결을 제안했다. 사업권설정계약은 몇 차례 정리를 거쳐 2008년 6월 다시 체결됐다. 이 계약이 바로 작가를 옭아매는 핵심이다. 위 사업권설정계약은 ‘검정고무신’ 및 그에 파생된 모든 2차적 사업권을 출판사가 갖고 수익을 분배하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 사업을 하려면 캐릭터에 대한 지분이 필요하다고 작가를 설득해 출판사 대표가 9개 캐릭터의 공동저작권자 등록을 마치기도 했다.2010년에는 이른바 ‘양도각서’도 작성했다. ‘검정고무신’ 작품 활동과 관련된 업무는 출판사를 통해 진행해야 하고, 작가의 개인적인 계약에 대해서는 계약금 3배 상당의 위약금을 지불하는 것은 물론이고, 출판사에 저작권 침해로 인한 형사고소 및 합의 권한을 위임하는 내용이다.이를 바탕으로 출판사는 2015년 TV 애니메이션 ‘검정고무신 시즌4’를 제작해 방영했다. 이 외에도 출판사는 캐릭터를 이용해 여러 종류의 만화를 계속 출판했고, 이 작가 역시 출판사의 관여 없이 독자적으로 몇몇 웹사이트에 만화를 공급하고 책으로 출판하기도 했다. 출판사는 이 작가가 만화를 계속 만들어낸 것을 문제 삼고 2019년 11월 이 작가 측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출판사의 사업권에 따라 만화 및 그 2차적저작물의 제작·사용·배포는 오로지 출판사만이 할 수 있는데, 이 작가가 이를 어기고 자신이 직접 만화를 제작·배포한 것이 계약 위반이라는 것이다. 거액의 위약금을 배상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 작가는 계약은 모두 무효라고 항변했다. 저작권 법리에 대한 이해와 거래 경험이 부족한 만화가로서는 ‘검정고무신’을 이용해 수익을 나누자는 출판사의 진의가 사실은 모든 권리를 다 내어놓으라는 것인 줄도 모르고 경솔하게 계약에 이르렀다는 주장이다. 나아가 위 계약들은 예술의 자유를 현저하게 제한하는 것이라는 점에서도 무효라 주장했다. 피고가 되어 대응할 수밖에 없었던 이 작가에게 재판 과정은 고통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2023년 3월 스스로 세상을 떠났다. 재판은 남겨진 가족들이 이어받았다. 같은 해 11월 약 4년의 재판 끝에 드디어 1심 판결이 나왔다.1심 법원은 작가를 옭아매는 이 사건 계약들은 효력이 없다고 선언했다. 사업화설정계약 및 양도각서가 현저히 불공평해서 처음부터 무효라고 본 것일까? 그렇지 않다. 법원은 계약은 모두 유효하다고 보았다. 출판사의 의도대로 쓰인 문구는 그대로 효력을 인정받았다. 모든 사업권은 출판사가 갖는 것이고, 작가가 이를 어겨 얻은 이익은 모두 위약금 산정의 기초 금액이 된다. 민법 제103조와 제104조를 위반하여 무효라는 작가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계약은 효력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다만 법원은 출판사의 일방적인 수익분배 조건 설정, 진행 및 분배 과정, 작가에 대한 출판사의 형사고소 사실을 기초로 당사자의 신뢰관계는 파괴됐다고 보았다. 일정 기간 반복적으로 급부가 이루어지는 ‘계속적 계약’은 기초가 되는 신뢰관계가 파괴되면 일방 당사자가 계약을 해지함으로써 장래에 향하여 효력을 소멸시킬 수 있다. 이에 따라 법원은 2019년 10월 이 작가의 해지의 의사표지로 계약은 모두 해지된 것으로 판단했다. 결국 작가를 옭아매던 계약은 2019년 10월 이전까지는 유효한 것이고, 판결을 선고하는 시점에는 효력이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계약 해지 이후의 출판사의 ‘검정고무신’ 이용은 이 작가의 저작권을 침해한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판결은 계약들의 “효력이 존재하지 아니함을 확인”하고, 출판사는 캐릭터를 표시한 “창작물 및 이에 대한 포장지, 포장용기, 선전광고물을 생산, 판매, 반포, 공중송신, 수출, 전시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선언한 것이다.잘못된 언론 보도 : 불공정계약으로 무효? 다만 위 해지 시점 이전에는 출판사가 권리를 유효하게 보유하는 것이고, 이 작가가 이를 일부 침해한 점을 인정해 유족들이 출판사에게 손해배상금으로 7500만원 상당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항소심에서 판결이 뒤집혔다. 2025년 8월 28일 항소심 법원은 1심과는 달리 오히려 출판사가 이 작가의 유족에게 4000여만원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언론은 드디어 불공정한 계약이 무효가 됐다고 대서특필했다. 일부 변호사도 인터뷰를 통해 민법 제104조가 적용돼 계약이 처음부터 무효가 된 것이라 설명했다.필자도 항소심 판결문을 직접 읽어보기 전까지는 언론 보도, 전문가 인터뷰 및 칼럼을 믿었다. 하지만 사실은 이와 달랐다. 항소심 법원이 계약을 무효로 돌린 게 전혀 아니었다. 어떻게 된 것일까.항소심이 드디어 ‘검정고무신’ 계약을 불공정계약으로서 무효로 인정한 것이라는 말은 판결문을 읽어보지도 않고 누군가의 잘못된 설명을 무비판적으로 따라 옮긴 것에 불과했다. 항소심의 판단은 기본적으로 1심 판단과 동일하다. 계약은 처음부터 무효인 것이 아니다. 단지 2019년 10월 이 작가의 해지의 의사표시로 인해 장래를 향해 효력이 없어진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1심과 달리 유족들이 오히려 4000만원을 배상받게 된 것일까? 이는 소송 기술적인 측면에서 설명할 수 있다. 1심에서 작가는 출판사의 저작권 침해 사실을 주장하면서도 그에 따른 ‘손해배상’은 청구하지 않았다. 출판사의 이용은 금지하지만, 돈을 내놓으라고는 하지 않은 것이다. 법원은 당사자의 청구를 넘어서는 판단은 할 수 없다. 그러니 출판사의 손해액만이 판결 주문에 등장한 것이다.2심에서 비로소 이 작가의 손해배상 청구가 추가되고 구체적인 금액이 등장한다. 재판부가 계산해보니, 양 당사자의 손해액이 각각 얼마이고 그 채권·채무를 대등액에서 소멸, 즉 상계를 하니 이 작가 측에 4000만원의 채권이 남게 된 것이다. 쉽게 말해, 서로 잘못한 것을 더하고 빼면 출판사가 돈을 뱉어야 한다는 결론이다. ‘검정고무신’이 우리에게 남긴 것항소심에서 정의가 실현된 줄 알았는데…. 조금은 맥 빠지는 결론이다. 필자도 이게 맞나 싶어 눈을 비벼가며 60쪽에 달하는 항소심 판결문을 훑었다. ‘검정고무신’ 판결은 개인 창작자의 손을 들어주며 계약의 무효를 선언하지 못했다. 곪을 대로 곪은 계약이 스스로 버티지 못하고 해지돼야 비로소 그 구속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 뿐이었다. 계약의 구속력이란 이렇게 무섭다. 하지만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는 것만은 아니다. 이 작가가 쏘아 올린 공은 창작자를 보호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저작권위원회는 창작에 관여하지 않은 출판사의 공동저작권자 등록을 직권으로 말소하며 선례를 만들었다. 문화체육관광부와 공정거래위원회는 만화 분야 표준계약서를 개정하고 불공정 약관에 대한 대대적인 시정조치를 감행했다. ‘검정고무신’이 만든 변화의 시작이다. 올바른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기 위해서는 판결을 왜곡 없이 냉정하게 분석해 현실을 인식하고, 창작자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실질적인 방법을 계속 연구해야만 한다. ‘검정고무신’이 우리에게 남긴 과제를 잊지 말자.백세희 법률사무소 아트앤 대표변호사

2025.10.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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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중 넘어 혐중, 그리고 돌아온 도쿄 한류 1번지 [EDITOR’S LETTER]

전문가 칼럼

“중국인을 무비자로 입국시키는 게 맞는 건가요? 범죄자들까지 자유롭게 들어오는 거 아닌가요?” “중국인 무비자 입국 시점에 대전 국가정보자원관리원(국정자원)에서 불이 났어요. 서로 관계가 있는 게 아닐까요?”최근 만난 20대 여대생과 50대 전업주부의 말입니다. 두 사람 모두 정부가 지난 9월 29일부터 내년 6월까지 중국인 단체 관광객이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도록 한 데 대해 우려와 반감을 보였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사전 점검으로 인터폴 수배·불법체류 전력자를 걸러낸다고 했지만 의심을 거두지 않았고, 국정자원 화재가 무비자 입국 개시 전인 9월 26일 발생했음에도 연관설을 믿는 모습이었습니다. 중국에 대한 반감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지만, 이제는 일부 정치권과 극우에서뿐 아니라 일반 국민 정서로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연구원이 한국리서치에 의뢰한 조사(지난 6월, 성인 남녀 1509명) 결과에 따르면 한국 국민의 66.3%가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응답했는데, 작년 8월 조사 때보다 2.5%p 상승했습니다. 중국에 대한 비호감 정서는 정치적 성향, 성별, 연령대를 불문하고 나타났는데, 진보 성향 응답자 63.8%, 보수 성향자 70.5%가 비호감이라고 했습니다. 성별로는 남성이 67.7%, 여성이 64.8%가, 연령대로는 ▲20대 80.0% ▲30대 70.2% ▲40대 72.5% ▲50대 62.0% ▲60대 60.2% ▲70세 이상 53.9%가 각각 중국에 대해 좋지 않은 인상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중국인의 국민성과 행동이 비호감이기 때문에 ▲정치체제가 공산당 일당 지배체제이기 때문에 ▲중국의 경제적 강압과 보복 때문에 ▲코로나19와 미세먼지 등 중국의 환경 문제 등 다양했습니다. 반중 정서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최근 혐중 시위까지 등장했는데, 시위대는 중국인이 많은 명동과 대림동, 여의도 등 서울 도심에서 ‘차이나 아웃’, ‘천멸중공’(하늘이 중국 공산당을 멸할 것)과 같은 구호를 외치거나 혐오 발언·욕설까지 하며 적대감을 드러냈습니다. 일부 정치권에서는 반중 정서를 자극하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데, 국민의힘이 중국인의 의료·선거·부동산 등 ‘3대 쇼핑’ 방지법을 당론으로 추진하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인데요, 반중 정서가 극단으로 치닫는 모양새입니다. 수출주도국인 우리로서는 중국과의 교역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중국은 2003년부터 지금까지 22년간 최대 수출 상대국인데요, 코로나19와 미중 갈등 등으로 비중은 낮아졌지만 여전히 전체 수출액 중 20% 내외(2024년 19.5%)로 1위입니다. 또 중국에서 사업을 하는 우리 기업은 삼성전자를 비롯해 약 3만개가 넘습니다. 결코 멀리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를 잘 알고 있는 이재명 정부는 여러 요인으로 멀어진 중국과의 관계 회복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데, 반중을 넘어 혐중 정서 확산은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국민 정서를 탓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불순한 의도로 가짜뉴스를 앞세워 반중·혐중 정서를 부추기는 행위는 방치해선 안 됩니다. 일본 도쿄의 한류 1번지 신오쿠보는 혐한 시위로 한국 관련 점포의 폐업이 속출하며 지역 경제가 큰 타격을 입었는데요,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를 막기 위한 노력 끝에 점포 수가 사상 최다 수준으로 회복했다고 합니다. 정부의 적극적인 대응이 요구되는 이유입니다.

2025.10.19 06:00

3분 소요